최근 공개된 윤봉길 의사의 처형 장면

"윤봉길 의사의 처형장면이 공개되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40분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있었던 윤의사의 처형 직전(사진위)과 직후(사진아래)의 모습으로 처형 다음해인 1933년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윤의사 처형 관련 극비 문서철인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수록된 것이다.

위의 사진은 처형 직전 일본 헌병들이 윤의사의 눈을 가리고 꿇어않혀 나무형틀에 묶고 있는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처형 직후의 모습이다.    (중일일보에서 재인용, 기사 입력시간 : 2002.04.10 22:25)

윤봉길(尹奉吉ㆍ1908년~1932년) 의사가 일본군에 의해 처형돼 순국(殉國 )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역사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사인 더 채널의 김광만 대표는 지난달 초 일 본 방위청 자료실에서 윤 의사 처형 관련 문서철인 만밀대일기를 찾아 내 10일 공개했다.

이 문서에는 1932년 12월 19일 윤 의사가 의연히 처형되는 장면과 당시 상황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특히 이 날 공개된 사진에는 일본 이사카와 현 미고우 시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의 처형 순간이 생생히 담겨 있다. 항일 투사의 순국 장면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그림(왼쪽)

연행 장면으로 알려진 사진(오른쪽)

yunbonggil(3).jpg

윤봉길의사(1908∼1932)

독립운동가, 본관은 파평, 호는 매헌(梅軒), 본명은 우의(禹儀)이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 아버지는 윤황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원상이다. 항일 의사.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30년에 중국상하이로 망명하여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미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 문하에서 동생 성의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성주록이 개설한 오치서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6년 서숙 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 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1928년 부흥원, 1929년 월진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30년 2월 만주로 망명, 다시 상하이로 갔다. 1931년 상하이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전전하며,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군 최고 사령관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중장,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혀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大阪)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윤봉길의사 어록]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의사 최후 모습 -“사형각오”… 형장서도 당당

1932년 12월 19일 순국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우테(쏴라)!』
『탕! 탕!』
1932년 12월19일 새벽 7시27분 일본 가나자와(김택)시 육군 작업장. 요란한 총성이 음침한 겨울안개를 뚫고 작업장에 울려퍼졌다. 형틀에 묶인 사형수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사형수의 이름은 매헌 윤봉길.
이 장면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 일본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백천)와 일본 장군 및 고관을 폭살,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윤의사에 대한 사형집행과정의 일부다.
고려대 아세아문제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총독부 비밀문서중에는 윤의사의 사형집행상황을 준비단계에서부터 형집행, 매장, 매장후 동향까지 상세히 기록해 놓은 수기 원본이 있다. 이 문서는 윤의사의 사형이 집행된 가나자와 지역의 헌병대장 소노 요시히코(증야방언)가 손으로 직접 쓴 생생한 역사의 기록이다.
소노는 윤의사의 사형집행 당일인 1932년(소화 7년) 12월19일 일본 헌병대장 앞으로 「상해 폭탄범 사형수 윤봉길의 사형집행 통첩」이라는 1차 통첩문(비밀517호)을 띄우고 있다. 이 통첩에는 윤 의사가 12월 18일 오사카로부터 가나자와 위수구금소로 호송돼 왔고, 그 다음날 오전 7시30분 가나자와시 교외에서 총살형을 당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윤 의사에게 쏠리고 있던 국내외의 관심을 고려, 윤의사의 사형 집행을 극비에 부쳤으며 사형집행을 완료한 뒤에야 신문기자들에게 그 사실을 통보했다.
비밀 517호에서는 『사형집행에 관한 자세한 상황은 참고로 그 훗날 통첩하겠지만 혹시 불순분자나 불온한 자의 책동과 시찰경계 등이 있을 수 있어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이와 같이 통첩함』이라고 적혀있다. 일제가 윤의사의 사형집행당시 국내외 동향에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노는 이 문서를 경기, 황해, 강원도 등지로 발송해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동향에 일본 기관들이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소노는 이 문서를 보낸지 3일만인 22일 다시 2차 통첩문을 띄운다. 비밀 제522호인 이 통첩은 「상해 폭탄범인 윤봉길 사형집행에 관한 보고 통첩」이라는 제목으로 사형집행 상황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사형집행 상황 기술
먼저 문서 머리에는 윤의사의 인적사항부터 기록돼있다. 『본적‥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9 한국독립당원 윤봉길 명치41년 5월 19일생』(명치41년은 1908년임) 또 윤 의사가 지난 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시라카와(백천)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살상하였으므로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같은 해 5월 25일 살인과 살인미수, 상해폭발물 단속벌칙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사형집행 장소로는 이시카와(석천)현 미고우시(삼소우)의 가나자와 육군 작업장내 서북쪽 계곡이 채택됐다. 『공중에 위험이 없고 단애는 높이 약 7m로서 사격에 적합하여 형장으로 적당』하다는 이유였다.
사형장으로 떠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윤봉길의 호송도착과 사형집행은 절대 극비로 할 것을 기획하여… 신문기자 등의 탐색과 기타 대중에 띄지 않게…』로 표현돼 있듯이, 헌병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007 작전」을 벌였다. 윤 의사가 사형장을 향해 떠난 시간은 12월18일 오전 6시25분. 차디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오사카 헌병대본부소속 4명의 사복헌병에 의해 압송돼 오사카역을 출발했다. 그러나 일본헌병은 기차로 호송하던 윤 의사를 목적지인 가나자와에서 한정거장 지나친 이시카와현 모리모토역에 같은 날 오후 4시35분 하차시킨다. 일본 헌병은 윤 의사를 하차시킨 즉시 몰래 빼돌려 자동차에 태워 오후 5시5분 가나자와 위수구금소로 압송해왔다. 주위의 눈을 피하기 위해 기차역 한 정거장을 지나쳤다 돌아온 것.
집행당일인 19일에는 소노와 본부 및 가나자와 분대 직원 전원이 출장나가 경계태세를 편 것으로 돼 있다. 소노는 『하사관 1명 상등병 2명은 간수와 같이 직접 호송을 맡아서 완전히 비밀을 유지하여 예정대로 사형집행을 무사히 종료함』이라고 적고 있다. 윤 의사는 오전 6시30분 가나자와 헌병 분대장의 지휘하에 헌병하사관 상등병 3명과 군법회의 간수 2명의 호송을 받으며 자동차로 구금소를 출발, 45분 후인 오전 7시 15분 형장에 도착한다. 네모토는 이어 윤 의사에 대한 사형집행 실시를 선언하고 마지막으로 남길유언이 없는지를 묻는다. 윤 의사는 유언진술을 한마디로 거절한 것으로 나와있다.
『범인은 사형은 미리 각오했으므로 이때에 이미 하등 말할 바 없음을 진술했음. 그 언어는 일본어로서 명료하고 약간 쓴웃음(고미소)을 띠었고, 그 태도는 극히 대담 침착함.』 소노가 사형을 당하는 당시 윤 의사의 모습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다. 헌병대장마저 윤 의사의 당당한 태도에 압도됐음을 엿볼 수 있다.
윤 의사의 사형집행은 2명의 일본인 하사관이 맡았다. 먼저 간수가 윤 의사를 형틀에 매달기 전 곧바로 앉도록 하여 두눈을 가렸다. 그뒤 양손을 형틀에 묶었다. 사격명령이 떨어진 시각은 오전 7시27분. 우국의 혼은 조국의 광복을 두눈으로 보지 못한 한을 남긴 채 허공에 붉은 핏자국을 남기며 산화했다.
『정­부사수 2명은 다같이 하사관(보칠군조 중야길삼랑과 횡정외길)을 선정, 범인의 눈을 가린 뒤 즉시 검찰관의 신호에 의하여 소정의 위치(죄수의 10m앞)에 엎드려 이중 정사수의 제 1발로써 미간부에 명중시킨 13분 후에 절명했음. 군의관은 창상을 검사하여 범인이 완전히 절명했음을 확인, 검찰관에게 보고하여 오전 7시40분 윤봉길의 사형집행은 그렇게 종료됨.』

쓰레기 소각장서 발견
다음은 윤 의사의 유해 매장상황이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즉시 유해를 씻어서 납관한 후 법규에 의하여 가나자와시 야내산 육군묘지에 근접한 가나자와시 공동묘지 서쪽에 깊이 약 6척을 파헤쳐 그 장소에 매장하여 오전 10시30분에 모두 종료됨.』
일본헌병은 사형집행뒤 예상되는 국내외의 동요에 대해서도 몹시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문서 제8장 「반응」부분에서 요시히코는 『(윤 의사의 사형실시 발표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 목하 극력 내사중』이며, 『토장의 실시는 발표에 앞서 완료하였으며 묘지의 소재는 극비에 부쳤으므로 목하 묘지 등에 대한 책동은 없지만 날이 가면… 자연히 일반인도(매장장소를) 알게 될 것이므로 상당 경계를 요함』이라고 적고 있다.
윤 의사의 매장지는 1946년 박렬, 이강훈, 서상한 등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일본 가나자와의 쓰레기 소각장 아래에서 발견돼 국민적인 울분을 샀으며 같은해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박춘호·필자·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윤봉길 의사 처형 사진>에 의문 제기" (김창호 학술전문위원)

① 문서-사진 종류 달라        ② 왜 평상복 입고 있나?

지난 11일 국내에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와 함께 최초로 공개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32)의사의 처형 장면 사진을 놓고 학계 일각에서 몇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진을 사전에 검토한 독립운동 전공 학자들이 제기한 의문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일본 방위청 자료실에서 발굴.공개한 이번 자료에서 문서와 사진이 다른 종류의 자료라는 것. 또 하나는 수형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다는 점에서 즉결처분의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이다.

이에 이번 자료를 공개한 '더 채널'의 김광만 대표는 '사진이 문서의 제일 뒤쪽에 붙어있으나 복사하는 과정에서 사진 부분과 글을 따로 처리하면서 일어난 일'이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만밀대일기'는 윤의사 처형 이듬해인 33년에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극비 보고서로 총 40여쪽이다.

그러나 윤의사는 실형을 산 이후 사형을 당해 수형복이 자연스럽다는 지적이다. 1932년 4월 29일 체포 후 5월 25일 상하이(上海)에 있는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金澤) 감옥 변두리 공병 작업장에서 형틀에 매여 총 두 발을 맞고 숨졌다.

이와 관련, 윤병석(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는 "윤의사의 친동생인 윤남의(尹南儀.86)옹이 이번 사진을 검증하면서 윤의사가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면서도 "사진과 문서가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선 김광만씨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윤의사 사진 진위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99년 5월 당시 상하이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근무한 강효백 박사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 거사 당시 체포.압송되고 있는 사진 속의 인물이 제3의 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윤의사는 25세였으나 사진 속의 인물은 35~50세로 보이며 ^거사 직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군의 폭행으로 정신을 잃고 진흙탕에 쓰러졌다는 당시 상하이 타임스의 보도와 달리 모자를 들고 끌려가는 등 옷차림이 너무 말쑥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근대사를 연구하는 한 학자는 "체포 당시 사진의 진위와 함께 이번 사진의 옷이 거사 당시 입었던 것인지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이번 사진이 진짜일 가능성은 크지만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기사 입력시간 : 2002.04.16 18:01)

"처형 사진 주인공 윤봉길 의사 맞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문서·사진 자료 일치         ② 유해 발굴때와 같은 옷

지난 4월 11일 국내에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와 함께 최초로 공개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의사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본지 4월 11일자 29면, 4월 17일자 14면>을 놓고 학계 일각에서 제기한 몇 가지 의문이 해소됐다.

이 사진과 관련해 제기된 의문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 방위청 자료실에서 발굴.공개한 문서와 사진이 서로 다른 종류의 자료라는 것. 또 하나는 수형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다는 점에서 즉결처분의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이다.

우선 첫번째 의문과 관련,이 자료를 공개한 '더 채널'의 김광만 대표는 '사진이 문서의 제일 뒤편에 붙어있었으나 복사하는 과정에서 사진 부분과 글을 따로 처리하면서 일어난 일'이라 밝혔다. 실제로 김광만씨가 공개한 '만밀대일기'에 따르면 일련 번호가 찍힌 자료의 일부이며, 이를 확대복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만밀대일기'는 윤의사 처형 이듬해인 1933년에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극비 보고서로 총 40여쪽이다. 특히 윤의사가 실형을 산 후 사형을 당했는데 수형복을 안 입은 게 이상하다는 지적도 의문이 풀렸다.

1932년 4월 29일 체포 후 5월 25일 중국 상하이에 있는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金澤) 감옥 변두리 공병 작업장에서 형틀에 매여 총 한 발을 맞고 숨질 당시, 사복으로 호송됐으며 사형 당시도 사복이었다는 기록이 '만밀대일기'에 명시되어 있다. 아울러 윤의사의 유해를 발굴했을 당시 동일한 사복을 입고 있었으며, 이 사진은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가 발간한 도록 '윤봉길'에도 실려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윤의사의 동생인 윤남의(尹南儀.86)옹도 이번 사진을 검증하면서 윤의사가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근대사를 연구하는 한 학자는 "자료의 공개와 그것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별개의 과정이다"고 전제하고 "이번에 공개된 '만밀대일기'에 포함된 '김구일파에 대한 최근 행동'등 김구를 체포하기 위한 밀정활동을 기록한 외사정보 보고에 대한 자세한 연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입력시간 : 2002.05.08 16:47)

"윤봉길의사 정신을 통일로 이어야"

동생 윤남의옹, 의거 70주년 상해 기념식 참석윤봉길의사 동생 윤남의 옹

"형님이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일본군 장성들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하신 지 벌써 70년이 흘렀습니다. 후손들이 그 분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오랫동안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친동생 윤남의(尹南儀.86.매헌 윤봉길 기념사업회 상임고문)옹은 29일 尹의사 의거 70주년을 맞는 감회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尹의사의 형제자매 일곱명 중 넷째. 생존자 가운데는 그와 누이동생 윤임의(尹姙儀.84)씨만이 尹의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尹의사의 의거 직후 고향집에서는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고 그는 회고했다.

"의거 다음날인 1932년 4월 30일 새벽이었어요. 저는 집 근처 사촌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일본 경찰들이 몰려와 대문을 부수고 집안으로 들이닥쳤어요. '네 형이 중국에서 큰 도둑질을 했다'며 저와 사촌을 구둣발로 차는 등 마구 폭행했죠. 저는 그때 '형님이 중국에서 큰일을 하셨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허겁지겁 집에 가보니 부모님이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조사받고 있더군요. 그날 밤 모 신문기자가 찾아와 의거 사실을 알려줬죠."

尹옹은 29일 상하이에서 열리는 '윤봉길 의사 의거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28일 출국했다. 10년째 열리고 있는 이 기념식은 윤봉길 기념사업회와 상하이 지방정부가 공동 주최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서는 尹의사의 출생에서 순국할 때까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이 열리며 전시된 자료들은 현지 尹의사 기념관에 영구히 보존된다.

尹옹도 28년 尹의사가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면서 조직한 '월진회'에 참여한 독립유공자다. 그는 당시 이 모임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축산장려운동.화장실 개량운동 등을 벌였다. 이같은 공로로 그는 건국포장(96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93년)을 받았다. 尹옹은 "선열들이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고 민족이 갈라져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통탄할 것"이라며 "죽기 전에 꼭 통일된 조국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최익재 기자, 기사 입력시간 : 2002.04.28 18:38)

   윤봉길의사 묘역 한국요인 오지 않아"

 "한국의 정부 요인이 이곳에 와본 적은 한번도 없어요. 尹의사께서 아시면 퍽이나 섭섭하실 겁니다."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야마 공동묘지내 고 윤봉길의사 묘역을 돌보고 있는 재일동포 박인조씨, 尹의사의 70주기인 올해 누군가가 다녀갔으면 좋겠다며

(중앙일보, 기사 입력시간 : 2002.04.12 17:52)

 중국 작가 샤녠성 윤봉길 의사 전기 발간

"스물네살의 젊은이가 어떻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울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났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전세계적인 영웅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소설 '천국의 새' (범우사)를 낸 중국 작가 샤녠성(夏輦生.54.여)씨. 지난달 27일 국내 번역판 출간에 맞춰 내한한 그는 3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침 올해는 윤봉길 의사의 거사와 서거 70주년이기도 하다.

"큰 형부가 김구 선생의 경호원이었던 유평파씨의 아들이라 그 분의 삶을 추적하다 보니 윤봉길 의사에 대해 중국인에게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됐죠."

1999년 중국 인민문학 출판사에서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장편소설 '선월'과 논픽션물인 '호보유망-중국에서의 김구'를 낸 후 이번에 세번째 책으로 윤봉길 의사의 일대기를 다루게 됐다고 한다. 작가는 尹의사가 처음에는 보통 농민에 불과했으나 일제하에서 농민운동가로 활동하다 중국에서 거사해 민족의 영웅이 됐다고 설명했다.

"중국에서 유명한 작가는 아니다"며 자신을 낮춰 소개한 그는 "앞으로도 한국에 관한 소설을 쓸 것"이라고 했다.

(중앙일보, 우상균 기자, 기사 입력시간 : 2002.05.03 18:40)

며칠 전 언론에 보도된 윤봉길 의사의 처형장면을 찍은 사진은 충격적이고 끔직했다. 하지만 그의 최후 모습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고귀한 희생정신을 느낄 수 있어 숙연한 마음을 갖게 했다. 1930년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재정 악화로 인해 청사 건물 임대료 지불은 물론 직원 채용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통해 1932년 이봉창 의사의 도쿄(東京)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上海)의거를 단행했다. 이후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성금과 중국 정부의 도움으로 재정형편이 다소 나아졌다고 한다. 또 의사들의 잇따른 의거는 중국의 뤄양(洛陽)군관학교에서 한인 1백여명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동기가 되기도 했다. 13일은 83번째 맞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이 전 민족적인 운동으로 확산될 당시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수립됐다. 이후 45년 광복 때까지 27년 동안 존재했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현재 우리가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이다.(김혜숙.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

(중앙일보   2002-04-12 17:40:38 )

윤봉길의사

관 련 자 료

  윤봉길의사기념관   서울 서초구 양재동 236  양재시민의 숲 내    02-577-9932

  윤봉길의사기념관   http://www.townet.co.kr/docs/yu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