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애국 계몽 운동의 전개

1. 애국 계몽 단체의 활동

독립 협회가 해체된 뒤에, 보수 정권의 압제 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열강 특히 일본의 이권 침탈이 더욱 격화되어 갔던 시기에도 개화 자강 계열의 많은 애국 단체들이 설립되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면서 구국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일본측의 압력으로 해산되었다. 헌정 연구회는 국민의 정치 의식 고취와 입헌 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규탄하다가 해산되고 말았다.

1905년 이후 개화 자강 계열의 민족 운동은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운동, 곧 애국 계몽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 애국 계몽 운동을 주도한 전국적인 규모의 대표적인 단체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그리고 신민회였다.

대한 자강회는 독립 협회 운동의 맥락을 이어 헌정 연구회를 모체로 하고, 사회 단체와 언론 기관을 주축으로 하여 창립되었다. 대한 자강회는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의 기초를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하고, 월보의 간행과 연설회의 개최 등을 통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화 자강 계열의 민족 운동은,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정 개혁을 위한 헌정 연구로부터 시작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자강 운동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대한 자강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1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나,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의 양위를 강요하자, 격렬한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로 해체되었다.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민권의 신장, 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대한 협회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크게 약화됨으로써 국권 회복 운동의 큰 흐름은 신민회로 이어졌다.

신민회는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안창호, 양기탁 등을 지도부로 한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 양성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신민회는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그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2. 교육 활동과 언론 활동

사회·정치 단체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을사조약 이후에 서북 학회, 기호 흥학회 등 교육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이들 학회는 교육 진흥에 의한 향토의 발전과 민족의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에 목표를 두고, 민중의 계몽과 신교육의 보급에 힘썼다. 이들 학회는 명칭은 교육 단체였으나, 실상은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정치와 교육을 결합시킨 구국 운동 단체였다.

한편, 황성신문, 대한 매일 신보 등 언론 기관도 국민 계몽과 애국심 고취에 한 몫을 담당하였으며, 본격화된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였다. 특히, 황성 신문은 주필 장지연이 을사조약에 분개하여 쓴 논설 '시일야 방성 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하다. 또, 이 시기에는 경제적 구국 운동으로 국채 보상 운동도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는 대한 매일 신보 등의 언론기관이 적극 참여하였다.

 

3. 애국 계몽 운동의 의의

애국 계몽 운동은 민중 계몽, 근대 교육, 산업 개발, 국학 연구, 언론 활동, 독립군 기지건설 등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첫째, 애국 계몽 운동은 민족 독립 운동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즉, 국권 회복과 동시에 근대적 국민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내세워, 당시의 민족적 과제에 충실하였고, 근대사의 발전 방향에 합치되는 민족 운동의 이념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둘째, 애국 계몽 운동은 민족 독립 운동의 전략을 제시하였다. 즉, 신민회는 국내에서의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과 더불어,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에 의한 군사력 양성을 당면의 목표로 잡았다. 이것은, 적절한 기회에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독립 전쟁론에 의거한 것이다.

셋째, 애국 계몽 운동은 장기적인 민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즉, 근대적 민족 교육을 발흥시켜 독립 운동의 인재를 양성하였고, 근대적 민족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 운동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간도와 연해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과면에서 한계성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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